2009년 출애굽기 제 12 강

여호와의 백성이 지켜야 할 법규

말씀 출애굽기 20:22-22:17

요절 출애굽기 21:1

“네가 백성 앞에 세울 법규는 이러하니라.”


  우리는 율법이라고 하면 은혜와는 전혀 상관없는 부담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관한 설교보다는 은혜를 누릴 수 있게 하며 믿음을 성장시켜 주시는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딱딱한 구약의 율법보다는 은혜로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율법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노예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주신 은혜의 말씀입니다. 율법주의는 나쁜 것이지만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삶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입니다. 법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1992년 LA 흑인 폭동을 생각하면 법 없는 세상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흑인들의 테러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으며 방화와 약탈로 엄청난 재산 피해를 입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한 본성 곧 노예근성대로 살지 않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율법 곧 법규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십계명을 주심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물질과의 관계에 대한 원칙을 제시하셨습니다. 이 십계명은 헌법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규례를 주십니다. 이 규례는 시행세칙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배울 수 있길 기도합니다.


  첫째, 종의 인권도 존중하는 백성입니다. (21:1-11, 21:26,27)

  하나님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함께 십계명을 백성들에게 직접 말씀하시자 그들은 심히 두려워 떨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제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규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네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여섯 해 동안 섬길 것이요 일곱째 해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나가 자유인이 될 것이며…” 고대 사회에서 노예가 되는 경우는 전쟁에서 포로가 되거나 채무를 불이행하거나, 도적질한 물건에 대해서 배상할 능력이 없는 경우 등 이었습니다. 이렇게 노예가 되면 속전을 치르지 않으면 노예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노예가 스스로의 힘으로 속전을 치른다는 것은 쉽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 노예는 평생 노예로 살아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히브리 종을 사면 육 년 동안 섬기다가 칠 년 째에는 몸값을 물지 않고 자유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때 노예가 홀몸으로 왔으면 홀몸으로 나가고 장가들었다면 아내와 함께 나갈 수 있었습니다. 만일 상전이 아내를 주어 아내가 자식을 낳았을 때는 아내와 자식은 상전의 소유이므로 혼자 나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종이 아내와 자식 때문에 나가지 않고 상전의 종으로 살겠다고 하면 상전은 그를 재판장에게로 데려간 후에 그의 귀를 송곳으로 뚫어 일생 종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귀를 뚫었다는 것은 일생 종으로 살아간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대부분 여자들이 귀를 뚫습니다. 초등학교 여자 아이들도 부모에게 귀뚫어 달라고 성화입니다. 심지어 남자 아이들도 귀를 뚫고 있습니다. 당시에 살았다면 모두 일생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자 노예의 경우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녀를 속량해야 했습니다. 또 만일 자기 아들에게 주기로 했다면 딸 같이 여겨야 했습니다. 만일 여종을 첩으로 취하고도 주인이 그에 따른 세 가지 의무 곧 음식과 의복과 동침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속전을 내지 않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남,녀 노예들이 상전에게 맞아서 불구자가 된 경우에도 속전을 내지 않고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21;26,27)

  하나님은 이 법규를 통해 한 번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했을지라도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은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사회를 보면 약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합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해야 하기 때문에 약자를 배려할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번 가난한 사람은 그 가난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을 받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때문에 아이들도 가난하게 살 가능성이 훨씬 많습니다. 실제로 학부모들이 선호하는 대원외고에는 부모님이 의료, 법조인인 학생이 22%, 민족사관고는 22.3%라고 합니다. 이렇게 부모의 학력과 경제적인 능력은 자녀에게도 그대로 이어질 확률이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재계발을 하면 대부분 그 지역에 살았던 가난한 토착민들은 모두 쫓겨나고 돈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정착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한번 빚을 진 사람들은 계속해서 빚에 허덕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약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사회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은 교회에도 많이 있습니다. 부자들은 교회에서 대접받고 가난한 사람들은 무시당하기까지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애찬을 부자들끼리만 나눔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켰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약자를 배려하고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이는 그 무엇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돈이나 사회적인 지위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자체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의 공동체입니다. 이런 교회에서 사람 자체를 귀하게 여기며 약자를 배려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우리 모임이 사람 자체를 귀하게 여기고 약자를 배려하는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우리 모임은 부자라고 더 대접받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무시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연약하여 쉽게 죄에 빠지고, 자신의 역할을 잘 못하는 사람을 판단하기 쉽습니다. 영적으로 투쟁을 잘하면 인정받고 그렇지 않을 때 무시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약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입니다. 죄는 세력이 있어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도 자주 연약한 사람들을 넘어뜨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특별한 은혜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하나님 안에서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에 종 된 사람들을 자유케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의지하여 죄에 종 된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죄의 세력에 연약한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서 자유한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조 바나바 목자님이 영 육간에 연약한 형제님을 영접하고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이 보실 때 아름다운 일입니다. 조누가 목자님 가정이 물질 문제가 있는 목자 가정의 자립을 돕는 것은 너무도 귀한 일입니다. 우리가 연약한 자를 배려하는 아름다운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둘째, 이웃의 생명을 존중하는 백성입니다.(21:12-25)

  하나님은 반드시 죽여야 할 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람을 쳐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나…” 만약 그 사람이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였다면 제단에서 자비를 구할지라도 잡아내려 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납치하여 판 사람도 죽여야 합니다. 이 율법대로라면 요셉을 잡아 미디안 상인에게 판 형들은 마땅히 죽어야 했습니다. 또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때리거나 저주하는 자도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저주하는 것은 ‘가볍게 여기다.’ ‘천하게 만들다.’라는 의미입니다. 부모를 우습게 여기고 멸시하는 자들은 죽여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부모를 저주하는 자를 죽이라고 하신 것은 이것이 그 부모를 주신 하나님을 저주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경우는 아니지만 상해를 입혔을 경우에는 같은 상해를 입힘으로써 갚도록 말씀하셨습니다. 23-2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린 것으로 갚을지니라.”

  하나님은 이처럼 생명을 빼앗거나 상처를 줄 때 그 만큼 자신도 당하는 법을 주셨습니다. 이 법을 동해보상법이라고 합니다. 이 법은 힘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또 힘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들에게 자기가 당한 이상으로 보복할 수 없도록 함으로 약자가 보호받을 수 있는 법이었습니다.

  우리 말에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 대학교에는 체육대학은 정문 근처에 있고 법학대학은 학교 정문에서 가장 먼 산 꼭대기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 여전히 유전 무죄, 무전 유죄의 현상이 법조계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힘의 논리가 지배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육체적인 살인뿐 아니라 말을 통한 살인도 경계하셨습니다. 그래서 ‘라가’ 곧 골빈 놈, 미련한 놈이라는 말을 형제에게 하면 심판을 받게 되고 지옥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육체의 살인뿐 아니라 말을 통해서 얼마나 그 영혼에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남기는가를 말해줍니다. 말 한마디가 그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반대로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람을 죽이는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 위로와 소망의 말을 해야 합니다.

  저는 과거 근심과 걱정이 많았습니다. 또 어머니가 강하셔서 저는 유약하게 성장했습니다. 이런 저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연약하고 우유부단한 저의 모습은 목자로서 다른 사람을 돕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한 자매 목자님은 제 성격 유형 검사를 한 후에 제가 목자로서 좋은 자질을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못났다고 생각했던 저의 성격이 오히려 많은 삼을 섬길 수 있는 성격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분의 위로의 말로 인해 제 자신에 대해서 새롭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의 연약함이 도리어 연약한 자들의 목자가 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의 말이 듣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무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들조차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존중할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경쟁 사회에서 사람들은 원치않게 상처를 주며 살아갑니다. 특히 가정에서 가장 많은 상처를 받으며 성장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가 받은 상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상처를 받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건강해졌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살리는 말을 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셋째, 이웃의 재산을 존중하는 백성입니다. (21:28-22:17)

  이상에서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는 규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재산권을 침해한 경우에 대한 처벌과 배상에 관한 규례를 말씀하십니다.

  22:1을 보십시오. “사람이 소나 양을 도둑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한 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갚고 양 한 마리에 양 네 마리로 갚을지니라.”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재산을 훔치는 경우에 반드시 배상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만약에 배상할 능력이 없을 경우에는 그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자기 몸을 팔아야만 했습니다. 또 도둑질한 짐승이 그 사람의 손에 있으면 도둑질한 사람이 두 배로 갚아야 했습니다.

  다음으로 사람이 밭이나 포도원에서 짐승을 먹이다가 자기의 짐승이 다른 사람의 밭에서 곡식을 먹으면 자기 밭의 가장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하게 하셨습니다. 또 불을 소홀히 관리하여 수확해 놓은 곡식이나 아직 거두지 못한 곡식을 태우면 불 놓은 자가 반드시 배상해야 했습니다. 사람이 돈이나 물품을 맡겨 이웃에게 지키게 하였는데 도둑이 들었습니다. 만약 도둑이 잡히면 갑절을 배상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도둑이 잡히지 않으면 그 집 주인이 재판장 앞에 가서 그 이웃의 물품에 손 댄 여부를 조사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재판장이 죄 있다고 하는 자가 상대편에게 갑절을 배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짐승을 맡은 사람의 소홀로인해 도둑을 맞게 되었다면 그 맡은 사람이 배상을 해야 했습니다. 또 이웃에게 빌려온 짐승이 그 임자가 함께 있을 때 상하거나 죽으면 배상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재산의 피해와 배상을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사람들의 생명뿐 아니라 재산을 귀하게 여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유물을 자신과 같이 귀하게 여깁니다. 자신의 소유물을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소유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장막 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의 양말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분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심지어 입으려고 잘 다려놓은 바지를 입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순회 인턴 훈련을 받을 때 장막에 제 양복을 둔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른 센타에 갔다 온 사이에 그 양복을 다른 분이 길이 까지 늘려서 입고 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교사로 나간 분의 양복인줄 알고 고쳐서 입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 내가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무엇이든지 귀한 것입니다. 내가 내 것을 소중하게 여기듯 다른 사람의 재산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제가 아는 분은 교회에서 어느 집사님이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고 하여 빌려 주었더니 떼먹고 갚지 않았다고 합니다. 큰 돈은 아니었지만 믿음이 좋다고 생각했던 분이 돈 문제에서 분명하지 못한 것을 보면서 신앙에 회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때부터 목사님의 말씀도 신뢰할 수 없고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돈 떼먹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 이후 그 분은 결국 교회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떠난 정도가 아니라 교회를 비방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재산에 피해를 입히고도 배상하지 않은 것 때문에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실족하게 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나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봅니다. 특히 돈은 사람들이 하나님처럼 섬기는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사람의 재산에 대해서 존중해야 합니다. 돈 때문에 형제를 잃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가장 슬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중심적인 세상,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에서 약자를 존중하며 개인의 생명과 재산을 존중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갈수록 자기 중심적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선은 자기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자기가 아닌 타인을 배려하는 삶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기 중심적인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속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삶을 살 수 있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