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민족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

 

‘복음’ 전하고 ‘제자’ 삼으십시오

 

튼튼한 가정에서 튼튼한 교회가


믿는 가정에서 자라셨나요?
저는 사랑이 많은 가정에서 자랐어요. 교회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다녔고요. 하지만 대학에서 한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는 회심의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 친구는 제게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더라고요.
   어느 날 저녁 그 친구와 함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제 룸메이트도 함께 있는 자리였어요. 그날 저는 저항하지 않고 주님께 제 자신을 내어드렸습니다. 어린 아이처럼 예수님의 품에 안겨 안식을 누리게 되었죠.
   그리고 그 즉시 밖으로 나가 거리에서 믿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숙사의 복도를 다니면서 친구들을 초청하기도 하고요. 친구들에게 제 신앙에 대해 숨김없이 말해주었습니다. 주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저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보다는 열정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가족들을 소개해 주시겠어요?
저는 에즈베리신학교를 다닐 때 아내를 만났습니다. 제 아내는 저희 학교 건너편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어요. 아주 아름다운 소녀였죠.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저도 신학교를 졸업했고, 우리는 며칠 뒤에 결혼을 했습니다. 자녀는 셋이 있는데, 지금 모두 나이가 삼사십대입니다. 그리고 손자 손녀들이 여덟이나 있지요.
   저희 자녀들은 모두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속한 교회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고요. 큰 딸은 대학에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위는 공공 분야에서 일하고 있고, 평신도 사역자가 되기 위해 서신으로 수업을 받고 있습니다. 둘째 딸은 목사와 결혼했는데, 사위는 지금 제가 과거에 몸담았던 켄터키의 에즈베리신학교에서 교수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 아들은 엔지니어예요. 지금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요리문답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며느리는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 과정을 졸업했습니다. 집에서 네 자녀들을 홈 스쿨링(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가정에서 교과 과정을 가르치면서 교육하는 것)을 하고 있죠. 자녀들이 성장해서 주님을 따르는 것을 보는 것은 아주 흐뭇한 일입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의 영적 교육은 어떻게 하셨나요?
언제나 한 식구가 테이블에 둘러앉아 가정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저희 가족의 습관이었어요. 보통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전이나 저녁 시간에 예배를 드렸죠. 그리고 언제나 하루 중 두 끼의 식사는 함께하도록 했고요.
   아이들은 꼭 교회에 보내고 주일학교에 참석하도록 했습니다. 제가 수양회나 컨퍼런스에 설교나 강의를 갈 때는 자주 아이들을 데리고 갔고요. 저희 아이들은 언제나 교회에 속해 있었고, 복음 전하는 것을 들으며 성장했죠. 그 아이들도 그리스도를 위해서 분명한 결심을 내렸던 때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가정마다 스트레스가 많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할 수없을 만큼 시간도 없고, 바쁩니다. 젊은이들에게는 현대 문화의 유혹과 압력이 아주 크고요.
튼튼한 기독교 가정들이 없이는 튼튼한 교회가 있을 수 없습니다. 자녀들이 자라날 때 일찍부터 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이 사춘기에 들어서고 독립적이 되기 시작할 때 더욱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 시작할 때 가까이에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제가 자녀를 키우던 때보다 더욱 키우기 힘든 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 안에서 우리가 부모로서 가지고 있는 책임은 훨씬 막중합니다.

 

클래스를 교회로, 학생을 교인으로

신학교에서 가르치기 전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6년 동안 목회자로 섬겼습니다. 대학에서 회심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하고 난 후 열정적으로 전도하기 시작했어요. 목회자로서 사역할 때도 마찬가지였죠. 전도의 열정으로 교회는 성장했습니다. 제가 에즈베리신학교에 전도학 교수로 초빙된 까닭이 거기에 있을 겁니다. 전도학 교수 자리는 웨슬레 전통 가운데서 처음으로 생긴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전도에 대한 저의 생각은 아주 짧은 것이었습니다. 삶의 방식으로서 대사명(혹은 대위임령)에 대해서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죠. 제자 삼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조차 알지 못했으니까요. 저는 사람들을 회심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 어떤 공식적인 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강의를 할 때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몰라 무척 당황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좋아, 그냥 복음서를 읽도록 하자.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을 교과서로 삼자.”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방식들을 살펴보자는 것이었죠.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대하시고 다루신 방식들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우물가의 여인과 니고데모와 머리 좋은 율법사와 병자와 손 마른 자와 귀신 들린 자 등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능한 원칙들을 추출하며 적용하기 시작했던 거죠.
   그런데 이런 생각이 다시 들기 시작했어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나가서 일하시기 위해 마음속에 두고 계셨던 어떤 계획이 있지 않을까?” 이전에 저는 예수님의 장기 전략을 살펴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주님의 계획을 발견하셨나요?
예수님께서 회심자들을 만들어내는 일보다 훨씬 더 큰 일을 하고 계셨음을 깨닫기 시작했죠. 예수님은 제자를 삼고 계셨어요. 즉 배우는 자들, 따르는 자들을 만들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본을 보이시고 동시에 말씀으로 그들을 가르치시며, 그들의 삶 가운데서 같은 패턴의 사역이 개발되도록 하셨던 거죠.
   예수님의 전략은 제자들이 제자 삼는 일을 하면서 세상을 향해 접근하라고 하는 대사명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저는  제 사역 속에 그 초점이 빠져 있으며, 큰 교회를 세우는 노력에 있어서조차 그 점이 빠져 있음을 깨달았던 거죠.
   방법과 프로그램과 테크닉은 물론 바뀝니다. 그러나 원리는 계속해서 지속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스타일을 다른 스타일로 변화 발전시켜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죠. 그래서 3년 동안 하나님께서 보내 주신 몇 사람들에게 투자하고 그들에게도 제자 삼는 비전을 심어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제자훈련을 시작하신 거군요.
예, 감사하게도 이러한 방법이 계속해서 그 다음 세대들 가운데서 열매 맺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나났네요. 저는 전도와 제자훈련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대사명을 성취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제 만인제사장직은 하나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각각 소수의 사람들을 제자 삼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된 사역을 할 수 있습니다.
   지난 44년 동안 저는 교수로 일해왔습니다. 지금까지 매주 화요일 아침 소그룹의 학생들과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제 아내 역시 월요일 저녁에 학생 소그룹과 모임을 갖습니다. 비록 한 교회를 담임하고 있지는 않지만, 제가 가르치는 클래스를 저의 교회로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저의 교인입니다. 이 관계 안에서 제가 실제로 제자 삼을 수 있는 학생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소그룹을 통해 어떤 것들을 기대하고 계십니까?
저는 소그룹이 끼치는 영향에 대해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소그룹을 운영하는 것을 좋아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한 가지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를 제자화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사명이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그리스도의 계획 이상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사명은 교회의 성화를 격려하는 계획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마음을 보여줄 수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 투자함으로써 그들 역시 여러분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우리 자신의 결점들과 실수들을 고쳐 줄 수 있는 조정자로 기여하게 됩니다.
저는 서로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지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멘토링의 상황 가운데 있기를 좋아합니다.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이러한 계획의 모체가 됩니다. 결혼 생활은 인간의 경험들이 서로 맞물려서 짜여지는 직물과 같아서 만약 가족이라는 것이 제대로만 작용한다면 그 관계는 바로 제자화의 관계가 됩니다.
대사명은 이러한 교육의 가장 기초적인 원칙을 세상에 대한 전도라는 상황으로 옮겨서 적용한 것일 뿐입니다. 이 점이 아주 명백한 사실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재생산의 기본적인 요소가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을 얻기 위하여 온갖 종류의 프로그램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세렌디피티 교재를 만든 라이만(Lyman) 목사님이 동생이죠?
그렇습니다. 라이만은 독립해서 독자적인 일을 하기 전까지 빌리 그래함과 7년 동안 일했습니다. 그의 관심과 은사는 소그룹 성경공부 분야입니다. 우리는 함께 크리스천 아웃리치(Christian Outreach)라는 그룹을 결성했습니다.
   그 그룹은 비영리단체로서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라이만은 소그룹들을 개발하고 소그룹들이 성경을 공부할 때 얼마나 창의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 성경 공부가 그것입니다. 이 교재는 전국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교재는 오늘날 나온 성경 공부 교재들 가운데서 가장 창의적인 프로그램 중 하나입니다. 그는 소그룹들을 위해서 다양한 성경을 출간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가정 성경을 작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사역의 철학을 가지고 있으며 자주 연락하며 지냅니다.

 

예배는 우리의 존재 이유

교수님은 개인적으로 영적 훈련을 어떻게 하고 계시나요?
저는 매일 아침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창조의 목적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관련 구절들을 검토했습니다. 저는 매년 한 차례씩 성경을 통독하려고 노력합니다. 대체로 아침 일찍 하나님과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 좋아합니다. 아침 식사 전에 못할 경우 되도록 빨리 그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일관성 있는 생활을 갖기 위한 비결은 하나님과 홀로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즉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서 성령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저는 교제하는 젊은이들에게 매일 아침 묵상 시간을 가질 것을 요구합니다. 물론 개인적인 영적 훈련에는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성경 공부를 하고 전도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일관성 있는 생활의 토대는 매일 주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루종일 주님과 동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길을 따를 수 있는 길은 성경의 교훈 아래로 우리의 삶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말씀을 감동하신 그 성령님이 기도의 사귐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와 예배로 하나님께 응답합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모든 활동은 예배로부터 흘러나와야 합니다. 기도나 공부, 설교, 전도 모두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그 분에 대한 경배의 표현이어야 합니다. 그 경배가 모든 일에 의미를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존재하는 전적인 이유입니다. 우리의 영은 이 일에 참여할 때 가장 활발해집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예배 가운데 있기를 쉬지 않고 기도하며 배우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멋지군요. 그러면 교수님은 갈등이 생길 때 갈등을 어떻게 해결하시나요?
제게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 중 하나는 큰 딸이 신앙으로 갈등했던 십대 시절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그때 저의 짐을 주님께 다 맡기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저는 우리가 그 어려움을 잘 통과해 낸 일에 대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 때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좀더 깊이있게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좀 성격이 다르지만, 몇 해 동안 교회 안에서도 슬픔을 가져다 주는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단에 속해 있는데, 그 교단의 리더십들이 성경과 ‘성도들에게 전해진 믿음’에서부터 멀어져가고 있었죠. 저는 기회가 닿는대로 그러한 신학적 자유주의의 경향에 저항해 왔습니다.
오늘날 신학적 자유주의는 점차적으로 교회가 전도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비록 저는 목사 안수를 받은 감리교인으로 남아 있지만, 성경을 믿고 있는 지체들과 더 많은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다. 물론 감리교 안에 있는 자유주의적 성향들은 다른 교단에 속한 교회들에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발견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인본주의 영향 때문이죠.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강한 요구로부터 떠나 자기 마음대로 방종하는 인본주의를 첨가하려는 것이 인간 본성의 한 경향입니다. 그럼으로써 전도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태도와 성경의 절대적 권위는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점이 제 마음에 슬픔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낙심에 빠져 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는 않아요. 저는 힘을 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당신의 목적들을 성취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제가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을 때 우리가 죄에 빠져 버렸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 세계를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은 성취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아 거룩함으로 아름답게 된 백성들을 불러모으고 계십니다. 그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종종 요한계시록에 있는 중요한 장면들을 묵상합니다. 7장 9절을 보면 흰 옷을 입은 무리들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들은 여러 민족들과 종족들과 국가들로부터 나옵니다. 대사명은 성취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역사가 어떻게 끝맺음될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역사는 보좌에 좌정하고 계시며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들을 창조해 내신 그 분 앞에 절하는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종착지에 기여하지 않는 것은 어떠한 것이라도 허탄하게 될 것입니다.

교수님께 영향을 주셨던 분들이 누구인지 알고 싶습니다.
제가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저에게 영향을 끼친 분들은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 시작은 부모님이었지요. 그리고 비록 의식적으로 제자 삼는다고 하지 않았지만 제자화하는 방식으로 저의 삶에 영향을 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는 제가 사우스웨스턴대학교(Southwestern University)에 다닐 때, 저에게 도전을 주었던 그 젊은이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과 함께 생활했던 몇 년 동안 저는 그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으며, 그들의 삶은 저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비록 기독교 신앙에 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중연설에 대해서 저를 멘토링했던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 사람은 토론 그룹의 코치였습니다(미국의 고등학교에서는 개인적인 서클 활동으로 토론 그룹에 참여하는데, 학업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교사의 추천을 받아서 참여할 수 있다. 수강하는 과목 외에도 준비하고 연구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이 토론 그룹에서는 지도 교사의 특별한 지도를 받으면서 정치, 역사, 문화 전반의 주제를 가지고 찬반을 나누어서 자료와 논리와 설득력을 연마하며, 학교대항으로 전국  대회가 개최된다). 강연하는데 제게 가장 많은 것을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이 토론 코치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측면에서는 제가 목사였을 때 철물점을 하던 한 노인을 기억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 아주 지혜로운 분이었습니다. 제가 철물점에 들리면 그분은 제 곁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어 주셨습니다. 때때로 그의 집에서 여러 날 밤을 새우기도 했습니다. 저는 몇 년에 걸쳐 저보다 훨씬 성숙했던 이와 같은 분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십시오!

이 모든 일에서 기도의 역할은 무엇이며, 제자의 삶에 어떻게 작용합니까?
제 생각에는 기도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그의 거룩하심과 위엄과 사랑의 광채를 묵상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존전에 있다는 의식에 압도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좀더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 이를 때에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에 대한 고백이 자연스럽게 따라나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내버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해서 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해 자신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죄인이었음에도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십시오!’이 사랑의 확신에서부터 개인적인 필요들을 간구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중보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과 예배로 마치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기도의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묵상 시간’의 초점은 바로 이러한 기도의 태도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도의 태도를 항상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헌신의 시간을 개발할 때 천국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무가치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용서 구하는 것을 포함해 우리가 당면한 필요들조차 구하는 것을 주저합니다. 그 점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하나님께 설명해 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필요들을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돌보아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염려들을 다 그분에게 맡겨드리는 것’, 이것이 우리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존전에 나와서 우리의 요청을 알리라고 초대하십니다. 하나님의 초대에 응하여 존전에 나갔을 때, 우리는 그 경이로움에 압도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기도는 경배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길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고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당신 스스로를 계시하십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창조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위엄과 권능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해 말해주지는 않죠.
   그의 아들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인격을 경험할 수 있고, 하나의 실재로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더하고자 성경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자신의 체험이나 자의식에 빠지지 않고, 상상력을 통해서 신을 만들어 내는 일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학적 자유주의의 문제입니다. 신학적인 자유주의는 하나님을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어진 이미지가 아닌 우리의 이미지대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 점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자유주의가 일종의 우상숭배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타락한 인간 이성에서 나온 신에게 절하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의 관점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교탁 위에 성경을 올려놓습니다. 저는 제게 배우고 있는 학생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보기 원합니다. 성경 위에 저의 손을 얹어 놓을 때, 그리스도께서 저의 곁에 계심을 느낍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을 예배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합니다. 그러나 제가 알고 있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이 성경 안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뿐입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감리교 전통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감리 교단과 교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세요.
저는 감리 교회에서 자랐습니다. 물론 감리 교회가 어떤 입장에 서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자라면서 ‘감리교’라고 불리는 교회가 더 이상 요한 웨슬레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단 하나의 오류도 없음을 믿었습니다. 그는 또한 인간의 완전한 부패를 믿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소망이 전혀 없음을 믿었습니다. 오늘날 감리교인들 가운데 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웨슬레가 믿었던 바는 각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에 충분한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혁 신앙과 알미니안 웨슬레 신앙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서 잘 의식하고 있습니다. 저는 두 입장을 모두 가르칩니다. 우리가 합치점을 찾을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전도’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한 백성을 삼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있습니다.
실제로 입장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이슈는 하나님이 선택하셨기 때문에 여러분이 믿게 되었느냐 아니면 여러분이 믿기 때문에 여러분이 선택받았다고 생각하느냐에 있습니다. 어느 입장이든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전도는 그 점에 있어서 한 가지 얼굴을 만들어 줍니다.
저는 어느 특정 교단을 전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어느 누구도 모든 것을 다 파악해 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이를 때 대부분은 우리가 생각했었던 것만큼 머리가 좋지 못했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성부 하나님께 갈 수 없으며, 그가 진리이시고 생명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웨슬레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데 충분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면 자유의지에 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좀더 명료하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지만, 우리가 해야 할 결정을 대신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은혜는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 갈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떻게 결정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거자로서 우리를 도와줍니다. 율법은 마침내 예수님에 의해서 “너희 마음과 영혼과 지성과 힘을 다해서 너희 주 여호와를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요약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있는 모든 것을 성취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거룩함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령 안에서 행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물론 성령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다스리시는 측면에서 성부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의 사랑 안에서 그리고 자신에 대한 계시로서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역사(力事)하시고 권능을 나타내시는 측면에 있어서는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성취하신 것을 우리 안에 실제로 발휘되도록 하시는 신적 인격이십니다.
예수님은 “그[성령]가 나의 것들을 취하셔서 그것들을 너희에게 계시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사진이며, 그 사진에 우리의 눈길이 주목되도록 해주시는 분은 성령님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성경이 선언하고 있는 것처럼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를 부를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시는 방식으로 되돌아 오게 되었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반짝인다

인간 역사에 대한, 특히 국가들을 통치하시는데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어떤 것입니까?
저는 하나님께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를 세우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법을 유지하는 것은 정부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어떠한 정부도 하나님 나라를 완전히 구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이 땅의 법들을 존중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사람의 법을 뛰어넘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정부의 반대를 받기도 하며 믿는 바 확신 때문에 핍박을 받기도 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의 구원은 어떠한 제도에 의해서도 좌우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제도는 어떤 것이라도 턱없이 부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도를 존중하지만, 그 제도에 진정으로 속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저는 결코 쇠하지 않을 하나님 나라의 멤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부흥의 필요성을 외치고 있습니다. 부흥에 대한 교수님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미국에는 부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도덕적인 타락이 편만해 있습니다. 모든 곳에서 그 점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서구 유럽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기독교적인 뿌리로부터 떠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깊어지는 악의 한가운데서도 기도하고 있는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땅이 이전에 부흥을 경험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유익한 일입니다. 전국적인 부흥이 휩쓸고 지나간 지 거의 백년이 지났지만 말입니다. 만약 우리 세대 가운데서 부흥을 볼 수 없다면 이 나라는 쓰러지지 않을까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좋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상황은 더 나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별은 밤이 깊어지면서 더욱 반짝이지 않습니까?     
   부흥에 대한 연구는 소망을 가져다 줍니다. 예를 들어서, 독립 전쟁 이후의 미국을 봅시다. 겨우 5%의 주민들만이 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가 북미 땅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장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부흥이 왔습니다. 1800년 경에 대규모의 부흥 집회들이 변경 전역을 뒤덮기 시작했으며, 점차 남부와 동부로 움직여 왔습니다. 이 운동으로부터 미국의 큰 교단들이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그 운동을 ‘제 2차 대각성 운동’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일을 다시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참되시고, 주권적인 성령님만이 그 부흥의 물결을 되돌리실 수 있습니다. 커다란 교회당 건물들을 짓고 예산이 많이 들어가는 굵직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 부흥은 아닙니다. 부흥은 ‘참된 회개’와 ‘믿음’ 가운데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의미하며, ‘거룩함’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 부흥이 일어나고 거룩함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더욱 하나님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하나님은 주권적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 그는 이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영원무궁하시도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은 지혜와 진리에 있어서 완전하십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정의로우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실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이 제한받으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인 선택에 의해서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까지도 다 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지금으로부터 천년 동안에 무슨 일이 진행될 것인지 정확하게 아십니다. 하나님은 세세한 사항들을 다 알고 계시며 우리의 생각들을 모두 알고 계시며 우리의 머리카락 수까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세상의 토대가 놓여지기 이전에 죽음을 당하신 어린 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별들이 제 자리에 놓이기 전에, 첫 파도가 바닷가에 물결치기 전에 구원의 계획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역사라고 불리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연출되어 나오는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올 시대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 같군요.
하나님의 속성들에 대해서 우리가 완전하게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영원’을 예로 들어봅시다. 우리는 시간과 시계와 달력에 묶여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것을 아예 가지고 계시지 않은 분에 대해서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 분은 항상 현재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나는 항상 있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 세계에 속하는 범주의 하나입니다. 시간은 시작을 가지고 있으며, 끝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무궁히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완전하심,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식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바울은 에베소의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해 주려고 시도했었습니다. 바울은 그 묘사를 시작하기는 했습니다만 더 멀리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깊이 있게 내려가려고 했지만 더 깊이 내려갈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바울은 묘사하던 일을 다 제쳐두고 “하나님의 사랑은 지식을 넘어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사랑의 장엄함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영광에 대해서 묵상하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사실을 영원까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늘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더 많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을 아는 능력은 더 자라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될수록 우리는 더 많이 알기를 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 탐구는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실현은 영원토록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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